“형, 하프 어때요?” 건강검진 결과표에서 시작된 나의 첫 마라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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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25년 12월.
83년생인 나는 그해 건강검진을 미루고 미루다 동네 내과 검진센터에 갔다.
며칠 뒤 결과표를 받았는데, 어디 한 군데라도 ‘이건 그래도 괜찮네’ 싶은 구석이 없었다. 고지혈증, 고혈압, 비만. 간 수치까지 높았다.
갑자기 아이들 생각이 났다. 그때 여덟 살, 네 살이었다.
‘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하지? 다들 잘 지낼 수 있을까?’
무서워졌다.
일단 살을 빼고 운동을 하자고 마음먹었다. 체중을 줄이려고 내가 선택한 건 위고비 를 맞으며 뛰는거였다. 추운 겨울, 운동복을 입고 동네를 뛰기 시작했다. 웬만하면 걷자 싶어 오랜만에 전철도 타고 버스도 탔다. 그렇게 걷고 뛰고, 또 걸었다.
“형, 마라톤 나갈래요? 하프 어때요, 하프.”
어느 날 아는 형님과 얘기하다 보니 형님도 나랑 비슷한 이유로 살을 빼고 운동에 한창이었다.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. 형님이 답했다.
“진짜? 한다고? 할까? 할까?”
그렇게 둘이 덜컥 접수했다. 상암동에서 열리는 보스톤영웅마라톤. 첫 대회인데 이름부터 뭔가 거창했다.(나중에 보니 이름만 거창 하더라 )
접수를 하고 나니 운동복을 입고 집을 나서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. 처음엔 체중만 좀 줄면 좋겠다 싶었는데, 이제는 어제보다 조금 더 빨리 달리고 싶었다. 체중도 좀 줄었다. 위고비 덕인지 달리기 덕인지는 나도 모르겠다.
대회 2주 전에는 형님과 한강에 나갔다. 대회 일주일 전부터는 무리하면 안 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터라, 우리 딴에는 날짜까지 계산해서 잡은 훈련이었다. 잠수교를 끼고 15km를 길게 달리는 LSD 훈련.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헉헉대며 뛴 게 과연 ‘천천히 오래 달리기’였나 싶다. 그래도 러너들이 한 번은 거친다는 잠수교를 지나 겨우겨우 마치고 나니, 왠지 나도 제대로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.
“참아야 돼.” 출발 전에 몇 번이나 했던 말
대회 날, 상암동에 모였다. 와……. 마흔넷을 살면서 이런 문화가 있다는 걸 왜 여태 몰랐을까. 중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친구들도 있었고, 여성 러너들도 많았고,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몸을 풀고 계셨다. 다들 운동하러 온 사람들인데 표정이 그렇게 즐거워 보였다. ‘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어땠을까. 그래도 이제 알았으니 나중에 우리 아들한테는 얘기해 줘야지.’
나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쭈뼛쭈뼛 몸을 풀었다. 형님과는 몇 번이나 다짐했다. “다른 사람들 따라가다가 우리 페이스 놓치면 안 돼. 참아야 돼.” 그러다가 우리 차례가 왔다. 출발!
다들 그렇게 달리길래 나도 같이 달렸다. 분명 참기로 했는데 가슴이 뛰고 신이 났다. 나름 조절한다고 했어도 연습 때보다는 빨랐던 것 같다. 그래도 좋았다. 처음엔…….
월드컵경기장에서 한강 쪽으로 넘어가는 길에 내리막 경사가 꽤 있는 다리가 있었다. 내려 갈때는 좋았는데 나중에 올라올때 는 진짜 너무 힘들었다. 같이 출발한 형님과 나는 어느순간 부터는 말이 없었다. 옆에서 서로 헉헉대는 소리만 들렸다. TV에서나 보던 급수대가 나오면 탁자 위의 물 한 컵을 집어 들고, 바나나 한 조각을 먹고, 또 뛰었다.
많은 생각이 든다더니, 이게 그 생각인가
사람들은 마라톤을 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돼서 좋다고 했다.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. 내 머릿속은 이랬다.
‘괜히 왔다. 입방정이 문제지……. 멈추는 건 좀 쪽팔리고, 그래도 하프 나왔는데 걷는 것도 싫고, 하긴 해야겠고.’
아, 맞다. 이게 그 많은 생각인가.
주위를 보니 내 속도로 뛰는 분들도 다들 한마디씩 투덜거리고 있었다.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. 조금만 더 참자. 그렇게 좀 지나니 이번에는 주변에서 다른 말이 들렸다. “할 수 있다. 할 수 있다.” 아까까지 투덜대던 자리에서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참…….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. 나도 속으로 따라 했다. ‘그래, 해보자. 할 수 있다. 쉬지 말자.’
그렇게 2시간 20분. 결승선을 통과했다.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, 내가 낼 수 있는 힘은 다 쓰고 들어왔다.
기분이 너무 좋았다.
그렇게 난 달리기 환자가 되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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